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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그는 누구인가?

이순신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었다. 문반 가문 출신으로 1576년(선조 9년) 무과에 급제하여 그 관직이 동구비보 권관, 훈련원 봉사, 발포진 수군만호, 조산보 만호,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를 거쳐 정헌대부 삼도수군통제사에 이르렀다.

함경도 동구비보권관, 1581년 발포 수군만호가 되었다가 전라좌수영의 오동나무를 베기를 거절한 일로 좌수사 성박의 미움을 받기도 했다. 이후 1584년 남병사의 군관과 건원보권관, 훈련원참군, 1586년 사복시주부를 거쳐 조산보만호 겸 녹도둔전사의로 부임했다. 조산만호 겸 녹둔도사의 재직 중 1587년 9월의 여진족의 사전 기습공격으로 벌어진 녹둔도전투에서 이겼지만 피해가 커서, 북병사 이일의 탄핵을 받고 백의종군하는 위치에 서기도 했다. 그 뒤 두번째 여진족과의 교전에서 승전, 복직하였다. 그 뒤 전라관찰사 이광에게 발탁되어 전라도 조방장, 선전관 등을 역임했다. 1589년 정읍현감 재직 중 유성룡의 추천으로 고사리첨사가 되고, 절충장군, 만포진첨사, 진도군수 등을 거쳐 전라좌도수사가 되어 임진왜란을 만나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부하들을 통솔하는 지도력, 뛰어난 지략, 그리고 탁월한 전략과 능수능란한 전술로 일본 수군과의 해전에서 연전연승하여 나라를 구한 성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노량 해전에서 전사한 뒤 선무공신 1등관에 추록되고 증 의정부우의정에 추증되고 덕풍군에 추봉되었다가, 광해군 때 다시 증 의정부좌의정에 추증되고 덕풍부원군에 추봉되었고, 정조 때에는 증 의정부영의정으로 가증되었다.

고려 때 정5품 중랑장을 지낸 덕수 이씨의 시조 이돈수의 12대손이며, 조선 초 영중추부사를 지낸 이변의 후손이다. 외가는 초계 변씨, 처가는 온양 방씨이다. 그의 묘는 충청남도 아산시에 있다.

 

명량 대첩(13vs500)


1597년 10월 25일, 일본군 수백 척의 이동 정보를 접한 이순신은, 명량 해협에서 대적하기 위해 13척의 전선을 이끌고 출전했다. 명량 해협은 ‘울돌목’이라고도 불리었는데, 폭이 294m 밖에 되지못하여 바다 표층의 유속 6.5m/s정도로 굉장히 빠르고, 밀물과 썰물 때에는 급류로 변하는 곳이었다. 이순신은 울돌목의 조류가 싸움에 불리함을 깨닫고 새로 합류한 1척을 추가한 13척의 전선으로 우수영 앞바다인 임하도로 진을 옮겨 일본 함대를 그곳으로 유인해 최소 130척 이상의 전선을 격파하였다. 난중일기와 선조실록에는 약 30여 척을 격침했다고 기록하였으나 이것은 통제사 이순신이 이끄는 공격부대의 전과일 뿐 임하도의 좁은 목을 막고 있던 수비 부대의 전과나 피해 사항은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난중잡록과 선묘중흥지을 통해서 조선 수군은 중.후반부터 화전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통제사가 적의 선봉대중 30여척을 격파하였지만 명량대첩비에는 500척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실제 격파된 왜선은 30여척보다 많을것으로 파악된다.

"破賊船五百艘 斬其將馬多時" "적군의 배를 쳐부순것이 오백척이며 그 장수 마다시를 베었다"<명량대첩비>

이를 명량 해전이라고 하며 이 해전의 승리로 조선 수군은 나라를 위기에 빠뜨렸던 정유재란의 전세를 역전시켰다. 일본은 곤궁에 빠져 명나라 장군에게 뇌물을 보내어 화의를 꾀하였으나 이순신은 이를 반대하고, 이듬해 1598년 음력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사하고, 사망 직전 철군하라는 유언을 남기며 일본군이 철수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