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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 그는 누구인가?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고 위대한 뮤지션 중 한 명이다. '팝 음악의 역사는 마이클 잭슨 등장 전과 후로 나뉜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가 팝 음악에 미친 영향력은 어마무시하다. 마이클 잭슨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고된 교육을 견뎌내며 가수 생활하는것을 시작했고, 잭슨 파이브로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보이 밴드의 메인 보컬에서 팝의 황제로 등극했다.

그의 등장은 20세기 대중문화사의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평가되며, 단순 음악을 넘어선 20세기 대중문화 그 자체를 상징하는 아이콘이었다. 음악을 통해 사회적 문제였던 인종차별을 완화시킨 문화 예술의 선구자로 여겨지기도 했다. 또한 음악사에 전례 없는, 미국 흑인이 음악적 주도권을 잡게 되는 최초의 사례를 만들어 냈고, 이로 인해 많은 흑인 가수들이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열었다. 동시에 대중음악의 주 장르를 록에서 팝으로 변화시켰으며 대중음악 역사상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아티스트 중 한 명이다. 말 그대로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은 역사상 가장 성공한 연예인[으로 기네스 북에 등재되었고, 20세기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이는 21세기까지 현재진행형이다. 또한 그는 팝스타 역사상 가장 많은 기부를 한 인물이기도 했다.

1980년대 마이클 잭슨의 등장은 하나의 사회적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의 앨범 Thriller는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기네스 북에 등재되었고 We Are the World와 같은 음악 활동과 기부로 박애주의적 활동을 주도하였다. 이후 Bad, Dangerous 등을 성공시키며 대중에게 전례 없는 많은 사랑과 지지를 받았으며 이는 사회적 현상으로 간주되었다. 또한 1990년대 본격적으로 시작된 대중문화의 세계화에 처음 등장한 서구 문화의 상징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1990년대 중후반부터 성추문 루머로 인해 언론들에게 완전히 먹잇감이 되어 버렸고 그를 미친놈으로 취급하는 분위기가 팽배했으며 안타깝게도 그에 대한 언론의 매도는 그가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백반증에 의한 고통과 누명으로 인한 스캔들을 거치며 건강 상태가 악화됐고, 2009년 6월 25일 주치의 콘래드 머레이의 무분별한 프로포폴 사용으로 인해 사망하였다.

지속되는 그에 대한 루머는 그의 문화적 유산과는 별개로 그의 위상을 추락시켰으며, 전문가들은 그의 이름이 음악사에서 잊혀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이후 그의 행적에서 발견되는 여러 선행에 따라 재평가를 받게 되었고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3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대중음악의 영원한 전설로 기억되고 있다.


세계적 인기


대한민국에서는 1984년 신문 기사를 보면 "한창 인기가 절정이던 조용필의 이름은 몰라도 마이클 잭슨의 이름을 모르는 젊은이는 없다던가. 국민학교 어린이까지도 그의 노래에 열광한다"라고 보도했다. 초등학교 5학년-중학교 2학년 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가수로 유일하게 외국인으로 마이클 잭슨이 뽑혔다. 또한, 국민학교 어린이 2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세계적으로 존경하는 인물 조사에서 링컨, 레이건, 에디슨에 이어 4위로 뽑혔다. 전라남도 다도해라는 먼 시골에서도 섬사람들이 청바지 차림을 하고 마이클 잭슨의 노래를 불렀다. 2015년에는 SBS 연예가중계가 조사한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남성 팝 아티스트' 부분에서 1위로 선정됐다. 북한의 최고 권력자인 김정은도 유학 시절 마이클 잭슨의 노래를 즐겨 들었다. 북한은 자신들의 체제 선전용 동영상에다 잭슨과 라이오넬 리치가 작사/작곡한 'We Are the World'의 음을 무단으로 도용했다. 잭슨 열풍은 옆 국가인 일본도 마찬가지다. 일본에서는 잭슨이 '태풍 마이클' 로 불렸으며, 켄 오타케 소니 뮤직 일본 사장은 "마이클 잭슨은 비틀즈 이후로 일본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엔터테이너이며 일본 사람들의 마음에 항상 남아있는 존재" 라고 말했다. 아프리카에까지도 잭슨의 이름이 알려져 인종차별을 해소하고 있다고 보도됐다. 1984년 이라크와 이란의 전쟁 당시 이라크에서는 '마이클 잭슨 작전'을 세워, 이란 전선을 향해 밤낮으로 쉴틈없이 마이클 잭슨의 노래를 트는 심리 작전을 펼쳤다고 한다. 인도에서도 잭슨의 인기는 엄청 나다. 가장 유명한 서양 아티스트로 잭슨의 인기는 인도 전 지역에 퍼져있으며 어떤 마을로 가도 사람들이 마이클 잭슨을 안다고 한다. 'Ahir Bhairab Borthakur'씨는 잭슨을 대체할 뮤지션은 없다고 말했다. 잭슨이 공연을 한 번도 하지 않은 파키스탄에서도 마찬가지로, 파키스탄 사람들에게 마이클 잭슨은 코카콜라와 유비쿼터스 같은 존재라고 한다. 폐쇄적인 기조를 유지한 중국에서도 마이클은 많은 인기가 있었다. 45세의 한 중국인은 "80년대 마이클 잭슨의 음악은 개방 시대를 처음 맞은 중국인들에겐 서양 문화를 상징하는 주제곡이었다."라고 말했다.

잭슨은 공산주의 국가들에게는 엄청난 골칫거리였다. 1988년 서독의 베를린 Bad Tour를 앞두고 동독의 비밀경찰인 슈타지가 바짝 긴장했었다는 비밀문서가 공개됐다. 당시 독일은 분단국가로 베를린 장벽을 사이에 두고 자유진영인 서독과 공산진영인 동독으로 나뉘었는데 슈타지는 장벽 인근에서 열릴 잭슨의 공연으로 인한 사회 혼란을 우려했다. 잭슨의 공연을 보기 위해 동독 청년들이 장벽 쪽으로 몰려가면 수습하기 힘든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슈타지는 고민 끝에 대형 스크린으로 잭슨의 공연을 중계하여 동독 청년들이 장벽 쪽으로 몰려가는 것을 막는 계획을 세웠으나 정작 공연이 열리는 날 이 계획은 시행되지 않았다. 결국 청년들은 잭슨의 노래를 듣기 위해 장벽으로 몰려 동독의 경찰들은 이를 막기 위해 진입하는 등 유혈사태가 일어났다. 한편 러시아에 대항하여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체첸공화국의 지도자 'Salman Raduyev' 은 체첸 사람들에게 'Michael Jackson'으로 불렸다. 체첸인들은 그가 마이클 잭슨의 노래인 'Heal the World'의 독립투사 버전이라고 믿었다. 멕시코에서는 마이클 잭슨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하여 멕시코시티 광장으로 1만 4천명이 집결하여 잭슨의 노래에 맞춰 춤을 선보였는데 이는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플래쉬몹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잭슨은 월드 투어가 열린 나라마다 지도자를 만났던 유일한 가수다. 25개국 국가 수장들과 만났으며 아프리카의 코트디부아르에서는 5개의 부족장들과도 만났다. 특수부대까지 출동한 대통령급 경호 대접을 받았다. 위키피디아와 유튜브에서도 잭슨은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2017.11.12일까지의 누적 데이터 기준, 위키피디아 최다 검색어 순위에서 잭슨은 9,630만 페이지뷰로 가수/밴드 통틀어 1위, 전체 검색어에서는 미국, 트럼프, 오바마, 인도, 2차 세계전쟁 다음으로 6위를 기록 중이다. 또 가장 많이 검색된 앨범 순위에서도 Thriller 앨범이 비틀즈, 에미넴의 앨범과 함께 1,200만 페이지 뷰로 공동 1위, Bad 앨범은 칸예 웨스트의 앨범과 함께 580만 페이지 뷰로 공동 27위이다. 유튜브에서도 잭슨 콘텐츠 관련 영상은 매달 꾸준히 3억 뷰 이상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최신 인기 가수들과도 비슷하거나 더 높은 수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