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제42대 대통령.
전후 세대 출신의 첫 번째 대통령이며,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시어도어 루스벨트, 존 F. 케네디에 이어 율리시스 S. 그랜트와 공동으로 3번째로 젊은 46세의 나이에 대통령직에 취임한 인물이다.
미국 역사상 최고의 호황기로 평가되는 1990년대를 이끈 대통령이며, 클린턴 대통령 재임 당시의 경제 호황은 닷컴 버블로 일컬어지는 거품 경제였다는 평가가 있기는 하나, 냉전 종료 이후 전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등극한 미국을 꽤나 안정적으로 통치했기에 역대 미국 대통령들 중 가장 높은 퇴임 지지율을 기록한 대통령으로 남게 되었다.
부인은 그 유명한 힐러리 클린턴.
대통령 당선 이후
당선되자 마자 미국 경제의 악의 축이었던 쌍둥이 적자, 즉 재정 적자와 무역 적자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가지 조치를 개시했다. 우선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정부기관의 상당 부분을 전자화해 공무원 30만 명을 해고했다. 또 레이건 정부 이후부터 계속 이어져 왔던 감세정책을 폐기하고 누진세를 확대해 재정 수입을 늘렸다. 빌 클린턴의 첫번째 재정 법안은 민주당이 다수당이던 1기 전반기에도 하원에서 218:216, 상원에서 50:50으로 갈렸다가 앨 고어가 찬성표를 행사해 가까스로 통과했다. 그 결과 1980년대 말 록펠러 센터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사들이며 무서운 속도로 치고 올라오던 일본을 멀찌감치 따돌리고 유일한 초강대국의 자리를 확고히 했다.
또한 재임 직후 북미자유무역협정을 체결했고, 부시 행정부 때 폐기되었던 미국 통상법 301조를 부활시켜 거의 모든 국가의 무역, 관세장벽을 무너뜨리고, 우루과이 라운드 체제를 통해 농산물, 서비스, 엔터테인먼트 사업 부분의 시장개방을 강제해 미국 산업의 시장 확대를 통한 무역적자 해소를 꾀했다. 또 미래산업으로서 IT, 금융산업을 중점적으로 육성했다. 이러한 정책으로 마이크로소프트 주도의 IT 산업, 월트 디즈니 컴퍼니의 오락산업 등 첨단산업이 크게 발전했으며 앨런 그린스펀 위원장을 필두로 한 연방준비제도 주도의 경제개혁도 성과를 보여 정부 재정이 흑자로 전환되고 미국 국내 경기가 클린턴의 임기 내내 호황을 이어갔으며, 1970년대 이후로 미국의 고질적인 사회문제로 손꼽혔고, 로널드 레이건과 조지 부시도 막강한 경찰력을 투입하고 교도소 수감자수를 크게 늘려놓아도 해결되지 않던 치안문제도 빌 클린턴 시절부터 개선되기 시작했다. 허나 갑작스런 시장개방으로 인해 많은 손해를 보아야 했던 여타 국가들(특히 동아시아 지역)의 반미감정을 촉발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물론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아내 힐러리의 주도하에 야심차게 추진했던 대형 프로젝트인 국민의료보험 도입이 결국 좌초하고 인기가 곤두박질쳐, 1994년 중간선거에서 대패해 상하원을 공화당에게 전부 내주게 된다. 뒤이어 벌어진 오클라호마 연방청사 폭탄테러사건을 신속히 해결하면서 인기를 회복했지만 그 뒤로도 여러가지 스캔들 때문에 고생했다.
평가
미국 역사상 최고의 호황기를 이끈 대통령으로 클린턴 집권 당시 미국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40여년간 대립하던 소련의 붕괴로 인해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그 어느 국가도 넘볼 수 없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이래 60년만에 최초로 8년 임기를 마친 민주당 대통령이 되었다. 또 후임자 조지 W. 부시의 실정으로 더욱더 클린턴의 업적이 고조되는 측면이 있다. 퇴임 8년 뒤 후임 민주당 대통령이었던 오바마의 당선, 재선과 함께 보수화되었던 미국 정치판의 축을 돌리는 대통령이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아래에서 보듯 소수민족과 여성에게 친화적인 정책을 폈으며, 환경 정책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미군의 동성애 정책을 일신한 "묻지도 말하지도 않는다" 정책, 즉 DADT도 큰 성과 중 하나다. 로버트 라이시(노동부 장관)와 같은 젊은 관료와 로이드 벤슨(재무장관) 같은 경륜의 인물도 잘 등용했다.
사실 클린턴의 임기 자체는 대단히 번잡했다. 업적도 많았지만 눈에 띄는 실책도 많았으며, 칭송도 많았지만 비난과 잡음도 많았다. 클린턴의 결정적인 탄핵안을 비롯해 의회와 대법원에서도 그야말로 박빙의 표결들이 여러차례 연출되었다. 빌 클린턴은 공화당에게는 부패하고 교묘한 사기꾼으로, 민주당 진보파에게는 모호하고 보수친화적인 정치꾼으로 비난받았고, 민주당과 공화당 사이에서 제3의 대통령 당을 이끌려고 한다는 식의 규탄도 받았다. 20년이 지난 지금에야 믿기지 않을지 몰라도, 퇴임 당시 그는 그렇게 고평가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8년 임기를 무사히 마쳤으니 그야말로 위기에 강하고 강운을 가진 사나이였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임기를 통틀은 가장 큰 실책으로는 글래스-스티걸 법안으로도 불리는 1933년 은행법을 폐지한 게 손꼽히는데, 경제 대공황의 원인이기도 한 은행의 고위험 투자를 막는 법을 폐지함으로서 금융기업과 상업은행의 분리가 의미 없어지고 후임자 조지 W. 부시 시절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세계금융위기의 경제난을 초래하는 데 기여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물론 빌 클린턴 혼자만의 작품이라기보다는 80년대 이래로 진행된 시대의 흐름을 따라간 것이라고 보는 것이 훨씬 타당하다. 그러나 지도자로서 미래의 화근을 알아채지 못하고 남들과 똑같이 훗날 미국에게 큰 상처를 입히는 비극의 기반을 쌓아간 것은 사실이긴 하다.
베이비 부머 세대를 대표하는 대통령이라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베이비 부머들은 2차 세계 대전 승리 후 초강대국으로 올라선 미국의 낙관주의 속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대단히 개인적으로 개방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온갖 성추문에도 불구하고 인기를 누릴 수 있던 것은 동세대의 성격과도 다르지 않다. ‘공화당원은 열심히 줄을 서고, 민주당원은 사랑에 빠진다’는 격언에 정확히 부합하는 대통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