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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 테슬라 그는 누구인가?

니콜라 테슬라는 세르비아계 미국인인 발명가, 물리학자, 기계공학자이자 전기공학자이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출신으로,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상업 전기에 중요한 기여를 했으며,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전자기학의 혁명적인 발전을 가능케 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테슬라의 특허와 이론적 연구는 전기 배전의 다상시스템과 교류 모터를 포함한 현대적 교류 시스템의 기초를 형성하였다. 그의 이러한 연구는 2차 산업 혁명을 선도하는 역할을 하였다.


테슬라의 독특한 발명 방식


테슬라는 흥분할 때마다 반짝이는 빛과 같은 환상을 보곤 했다. 그는 이를 ‘때때로 강한 빛과 함께 나타나는 이미지들 때문에 겪게 되는 특이한 고통’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이러한 고통스런 형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엄청난 정신적 훈련을 거듭했고 그 결과 그는 머릿속에 자신만의 상상의 세계를 가지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특별한 설계도나 모델이 있지 않아도, 또 실험을 하지 않고도 발명에 필요한 모든 과정을 머릿속으로만 해결할 수 있었다. 그는 새로운 발명품을 만들 때, 항상 모든 과정을 머릿속으로 실제처럼 구현을 한 후에야 행동에 옮겼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발명을 인류에 무료로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는데, 현 테슬라 모터스의 공익 특허 운영방식과 흡사하다. 그러나, 테슬라 전기에 따르면, 사람들이 본인의 아이디어를 이용하는것보다 사람 개개인이 독창적 창작을 가지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불만을 표출하기도 하였다.


테슬라의 강한 열의


1854년 안토니오 메우치가 발명한 전화가 유럽에 널리 퍼지면서 토머스 에디슨의 전화 교환소가 문을 열게 되었다. 테슬라는 그 해 1월에 마침 부다페스트에 도착하게 되었고 그의 삼촌의 도움으로 헝가리 정부의 중앙 전신국에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그 곳에서 열심히 일하며 과거 종합기술학교를 다닐 때 흥미를 가지게 되었던 교류 전기 장치에 관한 연구를 열심히 시작했다.

그는 당시 직류 모터가 가지고 있었던 문제를 교류 전기 장치로써 해결하고자 했고,

나는 그 문제의 해결을 무슨 신성한 사명처럼 생각했다. 바로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였다. 만약 실패한다면 그때는 모든 것이 끝장이라고 생각했다.

라고 말할 정도로 강한 열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친구와 공원을 산책하는 과정에서 나온 발상을 바탕으로 회전 자장의 원리를 이용한 완전히 새로운 시스템을 개발했다. 회전 자장은 두 개나 세 개의 서로 다른 위상을 갖는 교류 전류에 의해서 만들어지는데, 이 개념을 이용하면 기존의 직류 모터에는 반드시 있어야만 했던 정류자와 브러시가 필요 없어진다. 그는 끝없이 시스템을 보완해 가면서 교류 전기를 생산하고, 전송하고, 이용하는 데 필요한 모든 장치들을 설계했다. 여기에는 다상 유도 모터, 위상 분할 유도 모터, 다상 동기 모터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테슬라가 개발한 다상 시스템을 이용하면 전기를 생산하고, 전송하고, 분배하고, 또 기계적인 동력으로 이용하는 것, 이 모두가 가능했다.

1882년 테슬라는 가족과 오랜 친분을 유지하고 있던 푸스카스형제의 주선으로 에디슨 전화회사의 파리 지사에 일자리를 얻게 된다. 그는 많은 실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교류 시스템이 현재의 직류 시스템보다 훨씬 월등하다는 것을 증명해냈으며, 이러한 교류의 잠재적 가치를 알리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파리 지사의 책임자이자 에디슨의 동료였던 찰스 베처러는 그러한 테슬라의 능력을 알아보고는 미국으로 갈 것을 권유했다. 1884년 테슬라는 그의 추천서와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


테슬라 vs 에디슨 전류전쟁


에디슨과 만나게 되었고 그는 고장난 설비를 고치는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테슬라는 그 일자리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고 에디슨에게 인정을 받아 자유롭게 작업을 할 수 있었다. 작업을 하던 테슬라는 에디슨이 만든 원시적인 발전기를 좀 더 효율적으로 작동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테슬라는 에디슨에게 발전기를 다시 만들 것을 요구하여 스물 네 개의 발전기를 다시 설계하였고, 자동 조절 장치를 설치함으로써 발전기 성능을 크게 향상시켰다. 에디슨은 테슬라에게 이 프로젝트의 대가로 보너스 5만 달러를 약속했었으나 프로젝트가 완료된 후 금액을 지불하지 않았고, 이것은 테슬라가 회사에 사표를 내는 계기가 되었다.

1887년 4월 테슬라 전기회사가 새로이 창립되어 테슬라는 매우 열심히 일을 하였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수많은 발명품들이 설계되어 있었기 때문에 손쉽게 많은 특허를 따낼 수 있었다. 코넬 대학교의 전기공학과를 만드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윌리엄 앤터니는 테슬라의 교류 시스템의 가치를 한눈에 알아보고는 바로 지지하기를 시작했다.

때마침 에디슨의 직류 시스템을 바탕으로 수많은 발전소를 보유하고 있던 웨스팅하우스는 테슬라의 발명품의 가치를 눈여겨 보게 되었고, 테슬라는 2천 달러의 월급을 받으며 웨스팅하우스의 설비를 자신의 교류 시스템으로 바꾸는 직업을 갖게 된다.

에디슨은 테슬라가 웨스팅하우스와 교류와 관련된 계약을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화가 나 있었다. 이때부터 전류전쟁이 시작되게 된다. 테슬라의 교류 시스템에 위협을 느낀 에디슨은 곧바로 교류의 위험성에 대한 우려를 담은 자료들을 찍어내기 시작했다. 에디슨은 교류 전기를 이용해 애완동물들을 의도적으로 잔인하게 죽인 장면들이 포함된 전단지들을 배포하고 웨스팅하우스가 소유하게 된 특허들에 소송을 거는 등 끊임없이 웨스팅하우스의 교류시스템을 비난했다. 이를 지켜보고만 있던 웨스팅하우스는 에디슨에 대항하기 위해 교류에 대한 교육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했다. 연설, 기사 등 다양한 방법으로 교류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두 회사가 모두 자금난에 시달리게 되면서 전류전쟁은 더욱 심화되었다. 에디슨은 교류를 막기 위해 알바니에서 전압을 800볼트로 제한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려 했고, 웨스팅하우스는 법에 위반되는 음모를 꾸민 죄목으로 에디슨을 고소했다. 뿐만 아니라 에디슨은 죄수들의 사형에 교류 전기 충격을 사용하자는 주장도 하였으며, 웨스팅하우스는 계속해서 교류의 실상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대세는 점점 직류에서 교류로 넘어오기 시작했고 이를 직감한 에디슨의 많은 직원들은 에디슨이 큰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에디슨은 끝까지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다가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고 최종적으로 테슬라는 웨스팅하우스와의 계약을 연장하여 자신의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고, 웨스팅하우스는 사업 영역을 확장시켜 끝내 테슬라의 교류 시스템을 이용한 발전소를 세웠다. 이는 1891년 광산 지역에 전기를 공급하기 위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