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 그는 누구인가?
톨스토이는 1828년 러시아 제국 툴라현 크라피브나군에 위치한 톨스토이 가문 영지인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태어났다. 그가 2세 때 어머니 마리야 톨스타야 백작부인은 막내 여동생 마리야를 낳고 사망하여 '숙모'라고 부른 먼 친척 아주머니 밑에서 자랐다. 숙모라 불린 친척 타티야나 예르골스카야는 어머니와 다름없어 톨스토이의 훗날 성장과 작품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사실 '숙모'는 아버지와 서로 좋아하는 사이였으나, 자신보다 부유한 여성을 만나기 바라는 대인배 마음으로 청혼을 거절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사정을 아는 톨스토이의 생모와 관계가 오히려 나쁘지 않았다. 톨스토이의 생모가 사망하자 톨스토이의 아버지 니콜라이 일리치가 다시 청혼하지만 아이들과의 사이가 어색해질까봐 다시 거절하고 대신 평생 아이들의 엄마 노릇을 해주겠다고 약속한다. 이런 가정사는 1836년경 아버지의 유품인 편지를 정리하다 톨스토이가 발견했다고 한다.
참고로 톨스토이의 막내 여동생 마리야는 '숙모'라 불린 타티야나 예르골스카야의 조카 발레리안 톨스토이 백작과 결혼한다. 톨스토이의 아버지 니콜라이 일리치는 9세 때 급사하여 큰 고모가 후견인이 되었다가 14세 때 큰고모도 사망하여 작은 고모가 후견인이 되었다. 이 때문에 톨스토이 가문 형제들은 부모없이 서로 의지하는 사이였고 형제들과의 사이는 전부 좋았다고 한다. 특히 맏형인 니콜라이를 좋아했는데 맏형도 문학적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톨스토이는 1844년에 외교관이 되려고 카잔 대학 동양어학과에 입학했다가 다시 농민을 위해 일하려고 법학부로 전과하였다. 하지만 학업에 열의가 없고 자기 관심분야의 책만 보던 터라 수업태도 불량으로 유급했고 결국 자퇴한다. 1847년에 야스나야 폴랴나로 돌아온 톨스토이는 위의 형 셋과 달리 당시 귀족들의 진로인 문관이 되거나 군인이 되거나 중에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고 농촌에 틀어박힌다.
이때 잠시 농촌생활에 열의를 가지고 농노들에게 교육이라든가 의료를 제공하고 온정적인 지주가 되려고 노력하지만 농민들의 차가운 반응과 불신으로 실망하고 다시 도시로 나오게 된다. 이후 젊은 톨스토이는 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학사 검정고시로 학사 학위는 따지만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상류사회의 사교계에서 방탕한 생활을 보냈다. 어머니가 2살 때 죽어 일종의 컴플렉스를 가진 톨스토이는 성장하면서 여자에 집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거액의 도박 빚을 지는 등, 계속 무분별하게 살아가던 톨스토이는 그러한 삶에 만족하지 못하여 맏형 니콜라이가 복무하던 캅카스 전선으로 여행을 간다. 여기서 톨스토이는 농노 제도 없이 사는 카자크들의 삶에 큰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언어와 문화 풍속에 깊은 감명을 받는데, 여기서 쓴 글을 잡지에 발표하면서 작가 생활을 시작한다.
당시 러시아는 캅카스 지역을 병탄하기 위해 그곳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톨스토이는 호전적인 소수민족인 체첸인을 상대하면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긴다. 그러다가 1851년 본격적으로 입대하여 당시 귀족들처럼 유년 군사학교나 사관학교 출신이 아닌 포병 하사관부터 시작하여 공을 세워 현지 임관한다. 복무 중 틈틈이 그의 성장기가 반영된 반자전적인 소설을 썼는데 《유년 시대》(1852), 《소년 시대》(1854), 《청년 시대》(1857)가 그것이다. 이때쯤부터 본격적인 작가의 길로 들어서려고 전역 신청을 했는데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전역이 거부당하고 크림 전쟁에도 참전한 톨스토이는 세바스토폴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공을 인정받아 성 게오르기 훈장을 받고, 중위로도 진급한다. 이때부터 문필 생활을 시작하여, 1855년에는 세바스토폴 전투에 관한 짧은 글들을 잡지에 실었다. 이것이 《세바스토폴 이야기》이다. 이런 군 경험은 여러 작품에서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잔혹한 체험 때문에 톨스토이는 평화주의로 기울게 된다. 톨스토이는 1855년 군에서 제대하고 1857년부터 1861년까지 서유럽을 두 차례 여행했다. 그곳에서 교육 방법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된 톨스토이는 영지로 돌아와 농민의 자녀를 위한 학교를 열고 신문 《야스나야 폴랴나》를 발간해서 자신의 교육관을 설명했다.
작품의 특징
톨스토이는 현실주의 소설의 대가로서, 그의 두 가지 장편인, 전쟁과 평화 및 안나 카레니나로 유명하며, 이 작품들은 통상 이제까지 쓰여진 가장 훌륭한 소설들로서 여겨지고 있다. 전쟁과 평화는 특히 사실상 많은 독자들과 비평가들을 위해 이런 형식을 정의하는 것처럼 보인다. 톨스토이의 단편작들 중에서,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보통 중편 소설의 가장 훌륭한 예들로 분류된다. 특히 그의 만년의 삼십 년 동안 톨스토이는 또한 도덕 및 종교 선생으로서 세상의 명성을 얻었다. 그의 신조인 악에 대한 비폭력 저항은 간디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비록 톨스토이의 종교적 사상들이 더 이상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관심을 끌지는 못하지만, 그의 삶과 성격에 대한 흥미는, 무엇보다도, 세월이 흘러가면서 관심이 증가되었다.
19세기 영국의 시인이자 비평가인 매튜 아놀드는 "톨스토이의 작품은 예술 작품이 아니라 삶의 파편이다." 라고 말했다. 20세기의 러시아 작가인 아이삭 바벨은 논평하기를, 만일 세상이 스스로 글을 쓸 수 있다면, 톨스토이처럼 쓸 것이다라고 하였다.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의식에 대한 지극히 작은 변화들도 관찰하며 신체의 미미한 움직임들도 기록하는 그의 능력을 강조하였다. 다른 소설가들은 의식의 한 가지 단일한 행위로서 묘사하는 것을, 톨스토이는 일련의 무한히 작은 단계로 그럴듯하게 쪼개어 나간다. 영국의 작가인 버지니아 울프에 의하면, 그는 당연히 톨스토이를 "모든 소설가들 중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여겼는데, 이와 같은 관찰력들은 독자들에게 일종의 두려움을 끌어내었으며, 그들은 "톨스토이가 우리들 위에 고정하고 있는 시선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만년의 톨스토이를 방문한 사람들 역시 그가 자신들의 내뱉지 않은 사상들을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 때의 무척 불편한 느낌들을 이야기하였다.
톨스토이를 그의 능력들에서 신처럼, 그리고 인간의 조건들의 제약들을 탈피하려는 그의 투쟁들에서 거인으로 묘사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톨스토이를 자연과 순수한 활력의 현신으로 보았으며, 다른 사람들은 그를 세상의 양심의 화신으로 보았으나, 그를 알고 있는 또는 그의 작품들을 읽은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는 단지 이제까지 생존하였던 가장 위대한 작가들 중의 한 사람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탐색하는 살아있는 상징이었다.